늘 이해받고 싶으면서도 어쩌면 오랫동안 서로에게 낯설은 존재. 우리가 느끼는 가까운 듯 먼 듯한 인간관계의 느슨한 연결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건 참 쉽고도 어려운 일이란 걸 뮤지션 이나래가 음악으로 말한다.
이나래 인터뷰
Q. 데뷔 이후, 앞서 발매한 EP [Overwater], [Poom]에 이어 세 번째 EP예요. 새로운 앨범의 전체적인 컨셉트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직접 프로듀싱하는 만큼 기획 과정이 궁금합니다.
첫 번째 EP의 경우는 앨범 단위 작업이 처음이었던 터라 시행착오가 꽤나 많았어요.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어딘가로 떠밀려가는 느낌이었달까요? 그때의 혼돈 이후,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하기 전에 앨범을 관통할 수 있는 메시지를 반드시 생각해요. 꼭 거창하지는 않더라도요. 트랙들을 만드는 것보다 앨범 전체의 이미지를 미리 구축해 나아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꽤 오래 걸리는데, 결국은 자연스레 그 당시의 제가 보고 느끼는 것들이 담기게 되더라고요.
이번 EP [Strangers]도 물론 같은 과정을 거쳤어요. 작년 말부터 이런저런 그림들을 그려보던 중에 때론 확신이 없었는데도 계속해서 생각나는 주제였어요. 콘셉트가 어느 정도 정해지면, 심장이 터질 듯이 벌렁벌렁하기 시작해요. 그때부턴 해야 할 게 정말 정말 많으니까요!
Q. ‘누군가에게는 ‘Strangers’라 불리는 특별한 존재들에게!’ 라는 설명이 더해졌는데, 자신의 경험에 비춘 것일까요? 이방인적인 느낌을 받았던 경험을 공유해 준다면?
평생 내가 아닌 누군가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저는 거의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각자가 서로에게 낯선 이로써 남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다양한 형태로 스쳐 지나가는 인간관계를 겪는 과정에서 제 생각이나 의도와는 다르게 벌어지는 상황들에 ‘내가 잘못된 건가?’ 자책하던 적이 있어요. 또래 친구들보다 항상 조금 더 성숙하단 말을 듣곤 했는데, 어디에 있어도 언제나 조금씩 외로웠어요. 지금에서야 받아들이게 된 사실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당연히 남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와 같은 분들이 계시다면, 이번 EP [Strangers]를 한 번쯤 감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오래도록 모두 서로에게 낯선 존재들이에요.
Q. 평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전곡을 쓰고 프로듀싱했어요. 프로듀싱 과정에서 작업 방향성으로 꼭 앨범에 담고 싶었던 것들은 무엇이었나요?
어떻게 보면 조금 깊게 들릴 수 있는 주제로 시작한 앨범이지만, 그렇다고 곡들이 너무 무거워지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게 우울하고 가라앉아야 하는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앨범 전체에는 ‘자연스러움’을 담고 싶었어요. 그냥 제 모습으로요.. 아티스트로서 한 번쯤은 힘을 빼고 더 친밀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작업물에 힘을 과하게 들이면 저부터도 지쳐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요즘 느끼는 생생한 감정을 담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컸기 때문에, 묵혀있던 곡들을 몽땅 털어내듯이 작업하는 방식은 지양하고 모든 트랙들을 최근에 새로 만들었어요. 모든 과정들을 그냥 재미나게 하고 싶었고, 그런 선택 중 하나로 앨범 커버 촬영도 프로페셔널 인물 촬영의 경험이 전무한 사진가와 함께했어요. 우연히 보았던 몇 장의 사진들 속에 제가 바랐던 그 자연스러움이 있었고, 그만큼 만족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Q. 모두 최근에 만들었다는 수록곡들이 각각 어떤 사연을 통해 쓰여졌는지 궁금해요. 또 가장 쉽게 나온 곡과 가장 어렵게 완성한 곡은 무엇인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준다면요?
선공개 곡인 ‘삐요(BBI-YO)’가 제일 먼저 나왔는데, 새 앨범의 물꼬를 트는 트랙의 등장에 너무 신이 나서 본 녹음 전날 가이드 녹음을 하다가 목이 쉬어버렸던 기억이 있어요. 어느 뮤지션 지원프로그램에서 낙방한 직후 작업한 트랙인데, 그 덕분에 앨범 작업을 시작하고 또 완성할 수 있었으니 저를 떨어트려 주셔서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더블 타이틀곡 중 하나인 ‘비밀이야!’는 제목부터 가사까지 완성하기가 제일 어려운 트랙이었어요. 분명히 하고 싶은 이야기의 가닥이 잡혔는데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다가 제대로 된 가사는 녹음 당일 아침에 썼어요. 역시 창작자도 마감 앞에선 살아 움직이게 되더라고요(웃음). 또 다른 타이틀곡 ‘떠다니네’는 어딘가에서 둥둥 떠다니는 몽환적인 느낌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보컬 이펙터를 사용했어요. 반복되는 단순한 리듬으로 흔들리지 않는 담담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고, 평범치 않은 라인의 베이스 솔로 덕분에 곡의 분위기가 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애정이 가는 곡이에요.
Q. 지금까지 발매한 곡들이 어반 R&B, 팝 재즈,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는데, 뮤지션 이나래의 음악적 색깔이나 방향성을 직접 설명한다면?
뻔한 이야기긴 해도 저는 장르 구분 없이 이런저런 음악을 많이 듣는데 그 성향이 제 작업물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꼭 어떠한 장르를 파고들어야겠다! 나는 이 장르다!”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떤 음악을 하더라도 충분히 납득될만한 사람이고 싶어요. 어떤 풍의 노래를 들어도 ‘어? 이거 이나래 스타일이네?’ 말이 절로 나오게끔요. 미발매 음원들 중에도 여러 장르의 음악들이 있는데 언젠가는 한 장르만 엮은 프로젝트성 음반도 내보고 싶어요.
Q. 앨범 작업을 하면서 어떤 점들을 음악적으로 고민했고 어떻게 해결 방법을 찾아 작업이 완성되었는지 꼽아준다면요?
저는 오래오래 음악을 하고 싶거든요. 당장 1년 후, 길게 나아가서는 5년, 10년 후에 제가 또 어떤 노래들을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비슷한 진행, 송폼, 편곡 스타일에 갇혀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음악을 만들다 보니 무난히 들을만한, 그냥 중간 정도는 갈 수 있는 방법은 찾은 거죠. 이때 매너리즘에 빠진다면 더 이상 재밌게 음악 활동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수록곡 ‘삐요(BBI-YO)’와 ‘떠다니네’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아주신 콘아이스크림 스튜디오의 김재민 작가가 이런 제 고민을 들으시고는, “그냥, 한 번쯤은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싶은 걸 해봐요”라는 명쾌한 답변을 해주셨어요. 그때가 막 [Strangers]의 곡 작업을 시작하고 있던 때였는데, 지금의 제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나 봐요. 트랙들을 만들면서 조금은 덜 다듬어진 듯한 느낌이 들더라도 사용해 보지 않았던 악기나 사운드를 사용해 봤어요. 마치 미디 프로그래밍을 처음 접하고 신기해하던 어릴 적의 제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당시 그 호기심 덕분에 음악적으로 엄청난 발전이 있었거든요.
Q. 현재 네이버 나우 (NOW.)에서 <우리 오래 가요>로 매주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어요. 2020년부터 진행해왔으니 꽤 장수 프로그램인데요, 이 인터뷰를 빌어 어떤 프로그램인지 소개해 주세요.
고품격 음악 방송을 지향하는, 그러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접근성 좋은, 아주 편안한 음악 예능이 되어고 있는, 생방송 보이는 쇼 프로그램이에요. 프로덕션에서 이미 제작되어 그저 제게 진행만 맡겨진 프로그램이 아니고, 제가 직접 기획하고 운영해가는 프로그램이라 제게는 더 특별해요. 벌써 방송이 시작이 된지도 2년 가까이 되었는데, 사실 이렇게까지 오래 방송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계속 사랑받고 있어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입니다.
Q. 뮤지션으로서의 본업 외에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니 어떤 점들이 재미있고 어떤 점들이 음악 하는 것과 달리 새로운지 궁금한데요?
매주 2회, 그것도 심야시간에 생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또 매 회차 다른 아이템들로 새로운 방송을 기획하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와, 방송 일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이걸 어떻게 몇 년 동안 버티는 걸까’ 쓸데없는 오지랖을 가져보기도 했어요. 제가 PD나 방송작가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건데, 언제 또 이런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요. 새로운 아이템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것은 앨범을 만드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제게 꽤 잘 맞나 봐요. 정성을 쏟아 힘들게 준비한 회차의 방송 시청률이 잘 나오면 기분도 정말 좋고요. 방송은 시청자 반응이 없으면 어쩌면 의미가 퇴색되잖아요.. 역주행으로 추후에 충분히 사랑받을 가능성이 있는 음원에 비하면 조금 더 매정한 시스템이긴 하지만, 생방송은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에너지가 분명히 있어요. 시청자들이 만들어주는 힘인 거죠. 제게 주어진 일은 늘 열심히 하려고 해요.
Q. 뮤지션 이나래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어도, 곡들은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었잖아요. 집중해서 듣지 않고 BGM으로 듣다가 가끔 바짝 귀를 기울이게 하는 마성이 있어요. 어떤 것들이 이나래 만의 특별한 음악적 아이덴티티일까요?
어디선가 들어본 음악인 것 같아서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지만, 듣다 보면 생소함이 느껴지는 게 그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아직까지 저와 비슷한 음악 색깔을 가진 누군가 혹은 비슷한 노래들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저도 사실 제 음악들의 장르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할 때가 많은데, 완전한 팝도 아닌 완전한 R&B도 아닌 어느 정도의 애매모호함이 저는 좋아요. 그 사이에서 제 색깔을 점점 더 짙게 만들어보고 싶어요.
Q. 새 앨범 수록곡들은 직접 부르기도 했지만 여러 악기를 직접 연주하기도 했어요. 여러 롤을 맡아서 거의 핸드메이드처럼 공들여 앨범을 완성했는데, 여러 포지션을 직접 퍼포밍 해보면서 느낀 점들이 있나요?
역시 다 잘하는 건 어렵다! 그럼에도 악기 연주부터 음악 외적으로도 여러 포지션을 스스로 맡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는 별게 없어요. 제가 원하는 그림은 제가 제일 잘 알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연주를 잘하는 세션들에게 연주를 부탁해도, 소위 잘 나간다는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부탁해도 아쉬운 부분들이 조금씩은 생기더라고요. 물론 앨범이나 프로젝트의 방향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업의 결과물이 훨씬 좋을 때도 있겠지만요! 이번 EP [Strangers]에서는 낯설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혼자 다 해봤어요. 가내수공업이라는 표현이 알맞을 수도 있겠네요. 아, 하지만 저는 협업을 아주 좋아합니다. 언제든 환영이에요.
Q. 앨범 작업할 때 아니면 평소 이나래 개인의 취향으로 특별히 많이 듣는 뮤지션과 곡을 꼽아준다면요?
평소에는 모타운(Motown) 음악들을 정말 좋아해서, 모타운만의 빈티지하면서도 쿨한 R&B 음악들을 즐겨 들어요. 앨범 작업을 하면서는 안나케이(AnneKei), 코린 베일리 래(Corinne Bailey Rae) 곡을 자주 들었는데,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오묘한 느낌을 좋아해요. AnneKei의 [Touch]라는 앨범, 추천합니다!
Q.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출신이에요. 막 상을 받고 데뷔했던 때를 복기해보면 상이 주었는 효능감과 자신감을 주었는지 아니면 부담이었는지 궁금하네요.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수상은 음악가를 꿈꾸게 되면서 바라오던 이상향과 같았어요. 제 음악 활동의 첫 발걸음이 대회 입상이었다면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엄청난 자신감과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겠지만, 데뷔 싱글인 ‘Raining In Amsterdam’을 발표한 이후였어서 다행히 약간의 쿠션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데뷔 당시에는 저는 세상이 뒤집힐 줄 알았거든요. 발매 전날 ‘아, 내일 내 노래를 듣고 세상 사람들이 너무 깜짝 놀라면 어떻게 하지?’ 했다니까요(웃음). 하지만 세상은 깜짝 놀라긴커녕 제게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뮤지션을 꿈꾸던 소녀는 그렇게 자연스레 꿈을 이루고 그냥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가게 되었어요.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입상자라는 사실은 제게 언제나 긍지를 갖게 해줘요. 부담과는 반대로 더 좋은 쪽의 의미가 강한 것 같아요. 혼자 활동하는 솔로 아티스트로서, 음악 활동 초반에 만나게 된 꽤나 오래된 동료들이 있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힘이 나요. 뜻이 맞는 친구들과는 재미난 프로젝트 활동도 종종 함께하고 있고요.
Q 새 앨범 발매 후 활동 계획을 바이브에게 알려주세요!
단독 공연을 해보고 싶어요. 생각해 보니 데뷔 이후에 단독 공연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더라고요. 무대에 서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데도, 이러다가는 이제 내가 필요로 할 때 설 수 있는 무대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늦지 않게 추진해 보려고 해요. 하반기에는 또 다른 앨범 발매를 비롯한 재미난 프로젝트를 생각해 보고 있는데, 부디 계획대로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는 앞으로도 쭉 제가 그린 그림에 적당히 만족하고 적당히 나아가려고 해요. 지치지 않으면서 재밌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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