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RO 류지수 [살아지더라]
살아지더라. 참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모든 게 머물지 않고 지나가 버려서.
“못내 다시 뜨는 어두운 아침”이 두려워 “깨지 않길 기도”하던 순간으로부터, 비로소 스스로를 “나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내일로” 갈 수 있는 때까지.
제공: 비스킷 사운드
ALBUM [살아지더라]
[라이너 노트 - 윤시일]
오랜만이야. 모든 게 여전하네.
창작자들에게는 길건 짧건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휴식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새로운 노래를 발표하지 않는 시간 동안 뮤지션이 정말 온전하게 쉬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여러 무대를 바쁘게 오갈 때보다 더 치열하고 위태로운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소리를 찾고 이야기를 벼르는 일은 외로운 내적 투쟁이었을 테니 말이다.
류지수는 데뷔 이후로 거의 쉬지 않고 꾸준히 새뜻한 시도를 통해 자기의 소리를 만들어왔다. 그런 그가 1년간 노래를 내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새 노래를 부르기로 했을 때의 다짐을 짐작해본다. 이것은 “또 한 걸음 내딛”는 용기에 관한 이야기다. [살아지더라]는 침묵의 시간을 나오는 순간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못내 다시 뜨는 어두운 아침”이 두려워 “깨지 않길 기도”하던 순간으로부터, 비로소 스스로를 “나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내일로” 갈 수 있는 때까지.
류지수는 이 이야기를 덤덤하고 다소 체념적인 투로 말하면서도 애틋하게 부른다. 슬프다거나, 괴롭다거나, 아프다거나, 세상의 말들은 많지만 우리의 언어는 대개 실제 느끼는 감정보다 평면적이다. 싱어송라이터로서 류지수는 가사와 곡 구성, 가창이라는 도구들을 활용해 이 감정의 복합성을 드러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현실을 서술하면서도 애처로운 리듬을 따라가는 목소리엔 미련이 묻어나는 것이다. 이렇듯 만들어진 노래의 입체성은 침묵의 시간이라는 것이, 창작자들만의 것이 아닌 보편적 외로움과 잇닿아 있음을 확인시킨다.
따뜻한 날들이나 추웠던 날들이나, “그저 지난 밤의 신기루처럼” 두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하는 가여운 우리들. 다시 나선 길도 꿈처럼 휘청거릴지언정, 삶은 계속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인 이들의 내일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멈춰버린 듯한 새벽도 끝”이 난다는 걸 마음에 새긴 이들은 아무래도 좀 더 단단한 사람인 경우가 많으니까.
가끔 그런 신기한 일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누군가가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여전하게 느껴지는 경험 말이다. 그러다가 이내 깨닫곤 한다. 내 삶이 그랬듯이 이 누군가의 삶도 계속 진행 중이었으리라고. 내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동안에도 그는 아름차게 오늘과 내일을 준비하며 살아왔을 것이라고. 하지만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다시 만났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인생이라는 습작을 쓰는 사람들이 아닐까. 만났다가 헤어지고, 아파했다 잊기도 하고. 류지수의 노래처럼 그렇게, 살아질 것이다. 퍽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INTERVIEW 류지수 [살아지더라] 발매 기념 인터뷰
![류지수 [살아지더라] 발매 기념 인터뷰](./files/attach/images/182/149/067/8a57396991da5a4745b866e3623b40ea.jpg)
인터뷰이. 류지수
인터뷰어. 윤시일
Q. 오랜만에 발매하는 싱글이다.
2018년에 첫 데뷔 싱글을 낸 후로 꾸준히 앨범 작업을 해왔다. 음악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내가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해야 하는, 또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얼까 생각해봤을 때 그것이 가장 최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있는 노래를 하는 것도 ‘보컬리스트’로서의 내가 사랑하는 일이지만 없는 음악을 만들어내어 내 방식대로 들려주는 것이 가장 나다운 일이기에. 그 생각으로 달려왔지만, 올해 마지막 앨범을 발매한 후, 그 많은 음악 중 가장 나다운 색깔의 것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잠깐 멈추기로 했다. 내가 계획한 대로 1년의 시간을 가지면서 여러 가지 곡을 써보고, 들려주고, 피드백을 들어보며 고민을 하다가, 이 곡을 새로운 기점의 시작의 곡으로 내보내기로 정한 것이다.
Q. ‘시작의 곡’이라니 흥미롭다. 1년의 시간 동안 새로 비쳐 보이고 싶은 색을 찾은 걸까?
고등학교 때부터 나를 가장 가까운 곁에서 밀접하게 봐온 친구가 있는데, 이 곡의 데모를 듣고는 너다운 가사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 친구는 내가 하는 대화의 종류를 신기해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싶었단다. 애어른 같기도,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애 같기도 했을 것이다. 이 곡의 데모를 들려주면서 다른 장르의 곡들도 여럿 들려줬는데 내가 고민하던 장르적인 부분보다는 가사와 곡 자체가 가진 느낌에 대해 얘기해줬다.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네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얘기가 하고 싶고 그 얘기를 노래로 하고 싶은 것이니까 다수가 쉽게 많이 공감하지 못해도 나만이 가지고 있던 중요한 얘기들을 하자고 다시금 되뇌었다.

Q. 곡을 발표하기 전에 피드백을 나누는 건 주로 누구와 하는지.
원래 거의 들려주지 않는 편이다. 지인들에게는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피드백을 위한 것이라면 특히, 나는 남의 의견을 듣는 것이 어려워서 대부분은 들어도 흘려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외부의 다른 의견들이 필요할 때는 그때그때 옆에 있는 사람에게 랜덤으로 물어본다. 그것도 그닥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Q. 이번 작업에서 도드라지는 구성상의 특징 혹은 색다른 마음가짐이 있었다면?
색다른 마음가짐이라 하면, 노래로도 가끔만 부릴 수 있는 최대치의 솔직함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Q. 2018년 데뷔한 이후로 ‘류지수’의 음악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여러 모습을 보여줘 왔다. 이번 싱글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리길 바라나.
나는 국악적인 요소가 많이 들리는 음악과, 조금은 더 현대적이면서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음악의 틀 안에서 고민해왔다. 국악이라는 요소가 들어가는 순간 그 음악의 결을 살리는 것은 주로 ‘한’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물론 나에게 ‘한’이라는 감정이 크게 자리한다는 사실은 고등학생 때부터 나를 비롯한 대개의 리스너들이 공감하는 바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오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다른 장르의 곡을 쓸 때 얘기하게 되는 구체적인 감정들을 놓치게 될 수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조금은 덜 깊은 젊은 사랑 얘기라든지, 더 개인적인 삶에 대한 사유라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음악들과 세상의 더 많은 것들을 듣고 보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정형화된 사운드가 아니라 악기적으로도 가사적으로도 모던함의 적절한 배치가 더 도전된다면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한 결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 접점을 더 찾고자 하며 다양한 시도를 아직 하고 있는 중에 이 곡이 그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적절한 곡임을 느꼈다.

Q. 말마따나 국악적 요소를 늘 조화롭게 활용한다. 그런 작업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왜”냐는 물음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왜”는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감성이 좋았고 우리의 소리가 좋았고 우리의 언어가 좋았다. 그 감성을 따라가다 보니 그 소리를 찾아 듣게 되었고 그 언어로 곡을 쓰게 되었다. 특별하게 스킬적으로 장치를 배치한다거나 의식적으로 구현하려 하는 것은 없다. 그저 ‘그’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다 보면 나도 ‘그’것들을 내 목소리와 내 말투로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 들 뿐이다. 우리 한국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많은 것들 말이다.

Q. 가사도 직접 쓰는데 어디서 주로 영감을 받나. 특히 이번 곡을 쓴 류지수는 어떤 감성을 가졌던 것인지 궁금하다.
최근 몇 년간 마음의 병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었다. 덧댈 말이 없이 말 그대로 오롯하게 나의 정신이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모두를 떠나보내며 이 시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는 튼튼한 확신이 두터워진 것에 익숙하고 익숙할 때쯤 아무도 모르는 새 마음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이 곡을 완성했다. 실은 21살 때인가 썼던 곡인데 수년이 지나고야 싸비 제외한 모든 파트가 갈아엎어졌으니 이제서야 완성한 게 아닐까. 멜로디, 가사, 코드 모두 마이너-메이져로. 최초의 가사를 보면 기껏 스무 해 살아본 놈의 치기 어린 한이 오글거리게 처참히 고통스럽다. 그때는 외운 것처럼 ‘내 죽음은 타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을 거 같다’ 막 그랬던 때라. 그때부터 재작년 정도까지는 ‘죽지 못해 살아지더라’였는데 이제는 ‘안 죽으니까 살아지더라’가 되었다. 이 말장난 같은 게 진심이 되었다니 인생 정말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데 오래 걸렸지만) 우습기도 하고.
미안한 사람들이 참 많다. 그땐 안 미안했다. 우울 외 다른 감정이 내게 비집고 들어찰 틈은 막혔었으니까. 변명은 못 된다. 그걸 내가 제일 잘 알아서 사과에 사족이 없다. 사무치게 미안한 그 사람에게는 막심한 후회를 담아 용서를 빌어도 닿을 수가 없고, 쪽 팔면서 피해준 사람들에게는 머리 깊게 숙여 미안하다. 요 몇 년간 “요즘은 괜찮아?” 한참 많이 들었을 때 “나 괜찮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고 싶었는데 이제야 글로 써본다. 괜찮다. 살아지더라. 참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모든 게 머물지 않고 지나가 버려서. 미웠던 기억과 사랑스러웠던 기억들이 망각이라는 축복에 의해 발란스를 찾아서. 평생 나를 괴롭혀왔던 감정, 생각들에 다 리미터 걸고 받아들이며 사는데 그게 습관이 되니 고통이 귀찮아 인생 많이 편해졌다. 그 말을 안부 삼아 걱정으로 남아준 사람들 몇 에게는 경탄스럽게 고맙다. 나 같으면 불똥 튀지 않을 50살쯤에 안녕을 겨우 물었을 텐데. 진짜 나도는 말들처럼 그런 사람들 덕분에도 살아남게 됐고 인간이 인간에게 구원이 되는 경우는 이런 형태이구나, 발견했다.
말이 길어진다. 사실은 가감이 없었다면 A4 폰트 8, 13장 정도 분량으로 기승전결의 순서와 맥락이 설켜 있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의 4분 압축으로 곡을 다시 재정비했다.
나도 내 그 몇 년을 거대하게 뒤죽박죽 덩어리로 남겨놓고 복기할 용기가 안 나서, 가사로 치환시킬 때 기억과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켜 가공하느라 내 속은 다시 뒤집혔지만 결국은 노래했다.
내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무고한 시간과 청춘과 사람들에게 마침표를 찍고 싶었는데, 참 애매한 게 감정의 고장에는 정식의 마침 지표가 없다. 날고 기는 누구라도 완쾌를 지정할 수 없고 내 마음인데 내가 뭣 하나 시킬 수도 없는 퍽도 말 안 듣는 병이라는 그거. 그래도 2023년 1월 6일 노래로 시인했으니까 나의 마침표는 비정식적으로 오늘에 찍히는 걸로 내가 정한다. 이제 또 이어질 문장의 초석이 되겠지. 혹은 원컨대 누군가의 그것도.

Q. 지금의 류지수가 되기까지 어떤 뮤지션들의 영향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Coldplay. 이소라. 린. Sigur Ros. 한승석X정재일 (꼭 둘의 합이어야만 한다). 손성제. 정원영. 류이치 사카모토. 강산에. 박효신. Exo. NCT. Beyonce. 유희열. Nirvana. Oasis. 아 그냥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
Q. 음악 작업 외의 시간은 주로 뭘 하면서 보내는지.
빼먹지 않고 얘기하는 것은 야구. 나는 히어로즈의 팬이며, 인생의 가장 큰 원동력을 얻는 부분이다. 마을 키우는 게임을 열심히 하고, 친구들을 많이 만난다. 나는 친구가 많다. 라디오, 팟캐스트를 들으며 멀티태스킹으로 스도쿠를 푸는 것을 좋아하고, 스도쿠 대결에서 이기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수다를 떨고 논다. 논외지만 그 모든 것을 할 때도 늘 뇌 한 켠에 음악 생각을 디폴트로 설치해놓는 것 같다. 취미라는 것은 다 업의 추진력을 위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Q. 야구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도 음악 작업에 영감을 얻나?
영감을 받기 위해 게임이나 야구 따위를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음악을 할 때의 내가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기 때문에 기를 모아주기 위한 충전기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특히 야구 및 스포츠를 볼 때 느낄 수 있는 희열과 자극은 그대로 ‘나도 저들처럼 내 할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해야 할 많은 작업을 앞뒀을 땐 경기장을 찾아 충전을 하고 나서 시작하기도 한다. 이렇게 모든 취미들은 이제 곧 맞닥뜨려야 하는 작업을 두고 내 자신을 완화시키려 하는 장치들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Q. 사람들이 류지수라는 뮤지션의 다음 작업에 무엇을 기대하면 좋을까.
기대는 나 자신도 나에게 하지 않아서 사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자책의 말이 아니라, 다음 것에 대한 정해진 느낌을 별로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그때 그때의 나의 감정과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선택에 공감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모두 다른 타이밍에 같은 것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구나. 하는 그런 위로들. 다음 작업뿐만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모든 소리들이 개인의 일상에 가닿아서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하고 동떨어진 감정에 마음 놓고 슬퍼하거나 그것을 안을 수 있게 하는 그런 어두운 빛이나마 됐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게 솟구칠 때 곡을 쓰고 노래를 하고싶어지는 것 같다. 기대보다도 그런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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